1. 로버트 마이어스(Robert Myers)는 고차원 공간에서 자전하는 블랙홀 해를 밝혀낸 캐나다 워털루 대학의 교수이자 페리미터 연구소의 이론물리학자다. 1986년 당시 프린스톤의 대학원생이던 마이어스는 페리(Malcolm J. Perry)와 함께 '엉뚱한 이유'로 고차원 블랙홀 연구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의 이 위대한 논문은 아래 링크를 따라가면 볼 수 있다.
Spires 링크, Annals Phys.172:304,1986
어제 오전 내 세미나 발표가 있고나서 샐리 보든 빌딩에서 점심을 할 때 옆자리에 앉은 로버트 마이어스는 "이런 디테일을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었다 "며 말을 꺼냈다. LHC에서 만약 블랙홀이 발견된다면 그 블랙홀은 마이어스-페리의 고차원 블랙홀이며 그 블랙홀의 호킹 복사에 대한 연구를 해온 나로서는 그와의 대화가 즐거울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2. 세미나가 시작되기 직전에는 어제 거의 밤을 샌 덕분에 머리가 맑지 못했고, 긴장될 수 밖에 없었다. 내 세미나에서 오른 쪽 맨 앞줄에 미사오 사사키, 중간쯤에 로버트 마이어스, 그 보다 약간 왼쪽에 빌 언루, 내 바로 앞 첫 자리에 돈 페이지, 맨 왼쪽에 발러리 프롤로프, 왼쪽 뒤쪽에 히로타카 요시노, 그 옆에 마사루 시바타가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Oh My God!
이건 정말 '드림팀'이라고 불러야겠다. 아마 '블랙홀 물리학'에 대해 공부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특히 최근의 고차원 블랙홀에서의 성과들을 appreciate 하고 있는 분이라면 위에 언급된 사람들의 무게를 실감할 것이다.
이제 정말 그 수명이 간당간당하다고 절로 느껴지는 내 랩톱은 세미나 시작 직전 굉음을 잠시 냈고, 새로 부팅을 해야했다. 아무튼 노트북은 다시 작동했고 에릭 포아송 교수의 소개 (한국에서 온 ~~)에 대해 '실은 지난주에 일본으로 옮겼어요'라는 말로 세미나를 시작할 수 있었다.
주어진 50분 동안 그들의 깊고, 멋진 질문들을 쏟아 부었다. 거기에 정신 없이 대답하면서 뭐랄까 "내공이 쌓이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하면 내 느낌이 전달될지 모르겠다. 인텐시브하게 두뇌가 작동하고 있다고 느꼈고, 전혀 졸리지 않았다. 나는 이 일이 즐겁고, 내 연구가 자랑스럽고, 이 연구를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더 어려운 문제에 도전하고 싶은 용기가 솟았고, 이들과 지적인 교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즐거웠다. 이런 경험은 절대 자주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3. 에피소드 하나. 세미나 중간에 창밖에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리고 유유히 풀을 뜯으며 창 안을 들여다 보는 그 우아한 동물은 잠시 세미나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She is listening to your talk"
발러리 프롤로프의 제 때 터져나온 농담에 모두들 크게 웃었다. 이거 사진을 찍었어야 하는데!!
4. 로버트 마이어스와의 점심 시간으로 돌아가자. 나는 오래전부터 마음에 담고 있던 의문을 털어놓았다.
"저는 정말로 당신이 왜 그 연구에 뛰어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그 연구는 바로 마이어스-페리의 해를 밝힌 그 연구를 말한다. 그 논문을 나름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여전히 저자들의 모티베이션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로버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실은 잘못된 동기로 시작된 거였어요"
그가 밝힌 동기는 이렇다. 당시 끈이론 연구에 뛰어든 그는 Regge-기울기 현상 (질량-스핀이 일정 관계를 갖는다는 그 현상)이 Kerr 블랙홀이 극한인 경우 (extremal black hole)와 어떤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Kerr 블랙홀의 경우 각운동량이 임의로 커질 수 없으며 질량에 의해 상한을 가지게 된다. 이 상한의 값을 가진 블랙홀을 '익스트리멀 블랙홀'이라고 부른다. 익스트리멀 블랙홀의 질량-각운동량 관계가 Regge-기울기 현상과 같은 것이 아닐까하는 것이 당시 그가 가지고 있었던 의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실상 고차원 블랙홀은 각운동량의 상한이 없다는 것을 그는 스스로 발견하게 된다. 애초에 Regge 기울기 따위가 고차원 블랙홀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문제다. 중력장에 의해 시공간이 휘어졌을 때 나타나는 질량, 각운동량 관계와 끈의 진동 에너지와 각운동량 관계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건 자명하다.
아무튼 마이어스-페리의 해 자체가 그의 문제인식이 완전히 틀렸었다는 것을 완전히 증명하고 있다. 때로는 완전히 틀린 문제에 대한 답이 깊고 심오한 자연의 진리를 담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참 재미난 아이러니다.
5. 이제 일정이 이틀 남았다. 아직도 시차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시차에 적응할 때가 되면 일본으로 돌아갈 것같다. 오늘 낮엔 주위를 좀 둘러볼 여유가 있을 것 같다.





덧글
구도의길 2008/11/13 21:54 # 답글
"'블랙홀 물리학'에 대해 공부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특히 최근의 고차원 블랙홀에서의 성과들을 appreciate 하고 있"지도 않은 제가 봐도 ㅎㄷㄷㄷㄷ한 분들이군요. (한 분은 제가 견식이 짧아 처음 들어봤지만...) 그나저나 이젠 일주일 짜리 학회라도 아직 시차에 적응하지 못하셨다니 이 무슨 변고입니까.
ExtraD 2008/11/13 22:51 #
시차에 적응하려고 거의 노력하지 않아서 생긴 변고라..최근 소식에 따르면 교토의 중력계는 시바타, 시로미츠를 영입하여 막강 라인업을 구축한 걸로 보입니다.
구도의길 2008/11/14 05:49 #
그룹 홈페이지에서 찾아봤더니 그 시로미즈도 교토로 갔네요. 시바타는 찾지 못했지만... 이거야말로 ㄷㄷㄷ
제갈교 2008/11/13 23:18 # 답글
뭐랄까, 멋집니다. :)
ExtraD 2008/11/14 02:38 #
뭐랄까,감사합니다. :-)
누렁별 2008/11/14 00:02 # 답글
최고의 블랙홀 연구자들 앞에서 사슴도 찾아와 듣는 세미나를 하셨군요. 참으로 환타스틱 합니다 :)
ExtraD 2008/11/14 02:37 #
그렇게 써주시니 정말 환타스틱하게 보이네요.
angelina 2008/11/14 22:38 # 삭제 답글
저도 언젠가는 블랙홀 연구에 뛰어들어 그 과학의 깊이를 이해하고 싶어요.
ExtraD 2008/11/15 14:24 #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