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중년 신사의 친절 살아가는 이야기



문득 생각이 나는 일이 있어서요. (전에 작성하다가 저장해둔 글을 마무리 하려고요..)

벌써 꽤 오래전 헝가리 학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서 인천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셔틀로 이동하는 중에 생긴 일입니다. 아시죠? 게이트에서 직접 탑승하는게 아니라 트랩을 내려가 셔틀을 타고 비행기가 있는 곳까지 이동한 후에 다시 트랩을 올라가 비행기를 타는..

사실 제가 그 때 몸이 좀 안좋았습니다. 발에 통증이 생겨서 걷는 것이 힘든 정도였죠.

아무튼 제 바로 앞 사람까지 태운 셔틀이 한 대 떠나고, 그 다음 셔틀에는 거의 제일 먼저 탈 수 있었기에 비교적 편한 자리에 자리를 잡고 섰습니다. 운전사 바로 뒤에 있는 가로대에 기대어 있으니 통증이 있었지만 견딜만 했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창밖을 바라보고 어서 셔틀이 출발하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제 등을 두드리며 한국말로 "저 뒤에 분과 자리 좀 바꿔 주시죠? 불편하신 것 같은데.."라며 말을 겁니다. (외국이지만 한국인은 한국인을 쉽게 알아보는 경우가 있으니 한국어로 말을 건 것이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돌아보니 과연 어느 한 아주머니가 목발을 짚고 서 계시더군요. "아..그러실까요? 이리 오세요." 라고 대답을 했는데, 알고 봤더니 그 분은 일본인이었고 다리를 다쳤는지 무척 힘들어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일단 자리를 양보하고 나서 보니 제게 자리를 바꿔 줄 것을 요청하신 분은 중년의 한국 남자분으로 단순 관광은 아니고 어떤 비즈니스 때문에 파리를 다녀가시는 그런 인상이었습니다. 외국을 자주 나오는 분으로 세련된 매너와 예의를 갖춘 신사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 분이 서있는 위치는 제가 원래 서있던 자리의 바로 옆자리더군요. 그러니까 그 분은 그 목발을 짚고 계신 여성의 불편을 덜어드리기 위해 자신이 자리를 양보하는 대신 제게 자리를 양보해 줄 것을 제안했던 셈이었던거죠. 제가 반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배낭을 매고 있었으니 자신 보다 분명 손아래 사람으로 보셨으리라는 짐작을 하는데요, 그분의 기사도 정신은 '한국화 과정'(?)을 거쳐 장유유서의 원칙 속에서 자연스레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 분 덕분에 목발을 짚고 있던 일본 여성분은 비교적 나은 자리를 차지했고, 저는 친절을 배풀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며, 그 중년 신사분은 자신은 아무런 손해를 보지 않았지만 아무튼 그 여성분의 감사를 받으며 결과적으로 친절을 배풀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 기분이 어땠냐구요? 발이 아팠어요. T_T

덧글

  • Recce 2008/06/28 18:02 # 답글

    엄청나게 세련된 행위로군요!!!!
    저런분들은 저런 일석이조에 익숙하더라구요.--;;
  • ExtraD 2008/06/28 18:32 #

    제가 설사 발이 아프지 않았어도 그 세련됨에 불쾌함을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
    타인의 희생을 담보로 자신의 세련됨을 표현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 누렁별 2008/06/28 19:58 # 답글

    다음에 누가 등을 두드리며 묻거든 "What?" 이나 "스미마셍"으로 대응하시면 어떨까요 :)
  • ExtraD 2008/06/28 22:23 #

    친절을 배푸는 건 언제나 환영이에요.
    물론 유럽인이나 일본인에게도.. ^^
  • polarnara 2008/06/29 16:52 # 삭제 답글

    와; 현대식 신사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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